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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계의 이단아 귀스타브 쿠르베 ‘내가 본 것만 그린다’ 佛 사실주의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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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08회 작성일 18-04-2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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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작업실(L`Atelier du peintre, 1854~1855년)’. 인물에 대한 사실주의적 묘사와 다양한 상징, 알레고리가 얽힌 6m에 달하는 대작이다. 쿠르베의 사상과 삶을 축약한 한 편의 자서전 같은 명작이라 말할 수 있다.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당신이 지금까지 본 가장 충격적인 그림은 무엇인가. 벌거벗은 채 다리를 쫙 벌린 모습을 한 여성의 성기와 음모가 생생하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 1866년)’은 어떤가.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그려진 후 100년이 넘도록 대중의 시야로부터 감춰져 있던 작품이다. 지금이야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당당하게 전시돼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고 있지만 말이다.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품 중 하나로 거론되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운동을 주도한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년)다.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말해 도전과 스캔들의 연속 그 자체였다. 우선 그는 역사화나 종교화 같은 전통화뿐 아니라 당시 높게 평가되던 낭만주의마저 거부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본 것만을 그린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사실주의 운동의 선봉대에 섰다. “천사나 여신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을 그리는 데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그의 혁신적인 태도는 동료와 후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혁신은 명성과 함께 비난을 동반한 스캔들을 몰고 오기 마련이다. 가장 먼저 쿠르베에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져다준 작품은 ‘오르낭의 장례식(Un enterrement Ornans, 1849~1850년)’이었다. 종조부의 장례식 참여를 위해 고향인 오르낭을 방문해 그 장면을 기록한 6m가 넘는 대형화다. 이 작품은 뛰어난 완성도로 인해 전시되자마자 그에게 즉각적인 명성을 선사했지만 한편으로는 맹렬한 비난에도 직면케 했다. 그 주된 원인은 작품 사이즈와 인물들 묘사에 있었다. 당시 대형화는 역사화나 종교화에만 적용돼왔는데 쿠르베가 이 규범을 과감하게 깬 것이다. 또한 그는 실제 인물들의 표정을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렸다. 정형화된 아름다운 인물 묘사에 익숙했던 대중은 이 등장인물들의 평범함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누구라도 숭배할 수밖에 없는 완성도로 인해 비난은 곧 칭찬으로 바뀌고 그는 미술계 유명인사가 됐다. 이런 그의 위치를 확고하게 구축해준 또 다른 대형화는 ‘화가의 작업실(L`Atelier du peintre, 1854~1855년)’이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와 상징적 표현이 묘하게 결합된 명작으로 평가된다. 어떤 등장인물은 일반인을 모델로 그렸으나 동시에 어떤 유명 인물을 상징한다. 예를 들어, 사냥개와 함께 있는 수염 있는 남자는 누가 봐도 나폴레옹 3세처럼 보이는 식이다. 인물의 배치, 상황 등 구도는 온전한 창작의 결과다.

왼편은 각계각층의 반대파, 오른편은 보들레르 같은 지식인 친구들·예술 후원자들을 배치시켰다. 화면 중앙의 전형적인 고전 누드화 포즈의 여인은 쿠르베가 타도하려는 전통화를 상징한다.

이처럼 쿠르베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혁신을 일구며 젊은 세대 화가들에게 감명과 영감을 주는 영웅적인 화가였다. 그런 그가 왜 파산한 채 외롭게 죽어야 했을까. 자신이 그토록 존경했던 렘브란트와 똑같은 전철을 밟아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결과는 같지만 이유는 전혀 달랐다. 방탕한 낭비벽과 비타협적 예술관이 렘브란트 파산의 주된 원인이었다면, 쿠르베는 코뮌 정치활동과 결국에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기질이 문제였다. 그나마 렘브란트는 모국에서 죽었지만 그는 고향을 그리며 망명지에서 숨졌다.

문제의 발단은 나폴레옹 1세의 동상 철거와 연루되면서 비롯됐다. 코뮌이 정권을 장악하자 주동자들이 이 조각상을 철거했다. 그러나 실권과 동시에 이들은 모두 국외로 망명하고 파리에 남아 있던 쿠르베에게 모든 화살이 돌아갔다. 사실 그는 코뮌 내에서도 주류와 어울리지 못해 미운털이 박힌 상태였다. 그는 자신은 철거가 아니라 이전을 주장했다고 변론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몇 개월이기는 하지만 옥고를 치러야 했다. 게다가 새 정권이 동상을 다시 짓기로 결정하면서 모든 비용을 쿠르베에게 청구했다. 파산을 면하기 위해 스위스로 망명을 떠나야 했고 그곳에서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1862년에 그린 ‘기대 누운 누드(Femme nue couchee, 2015년 11월 9일, 크리스티 뉴욕 경매, 약 1530만달러(약 165억원)에 낙찰)’를 보라. 얼핏 보면 전형적인 고전 누드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다리에는 하얀 스타킹과 구두가 신겨져 있고 심지어 한쪽은 흘러내려와 있다. 이런 누드화가 있었던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에로틱 누드 도상이 아닌가! 또한 섹시한 포즈는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1800년경)’를 연상시키기도 하나, 쿠르베의 그녀는 고개를 젖힌 채 관객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이는 요염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누드화 속 여인의 시선을 기대하는 남성 관람객의 욕망을 농락하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게다가 그녀의 부드러운 살갗은 피부 밑의 핏줄이 보일 정도로 사실적이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녀가 나를 외면한 채 잠들어 있는 것이다.

쿠르베는 기존 누드화의 틀을 깨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하얀 스타킹을 신은 여인(La femme aux bas blancs, 1861년)’을 보라. 전통에서 벗어난 특이한 각도인 데다가 음부를 드러낸 채 천연덕스럽게 다시 스타킹을 신는 그녀는 고상해 보이지 않는다. 여신을 연상시키는 고전 누드화 속 우아한 여인들과 달리 그녀는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매춘부가 아닌가. 매춘부를 누드화의 주제로 삼다니! 쿠르베는 이렇게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다. 게다가 상념에 젖은 듯 허공을 향한 그녀의 시선 역시 농염하게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원하는 남성 관람객의 기대를 여지없이 외면하고 있다.

‘잠(Le Sommeil, 1866년)’은 또 어떤가. 1872년 한 화상이 이 작품을 전시했을 때 경찰이 출동해 그림을 철거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던 작품이다. 뒤엉킨 채 단잠에 빠진 두 여인의 에로틱한 포즈로 인해 누가 봐도 동성애를 주제로 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 시대에 허용됐던 남성 동성애와 달리, 여성 동성애는 시대를 막론하고 금기시돼온 주제다. 하지만 그깟 금기 따위가 쿠르베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미묘한 피부톤의 차이로 생명력 넘치는 두 여인의 육감적인 누드를 한 화면에 담아낼 수 있다면 말이다. 만지고 싶을 정도로 촉각적이고 살냄새가 풍길 듯 생생한 누드! 그리는 대상의 물리적 특질을 그대로 포착해내려는 쿠르베의 고통스러운 집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마도 그는 이 그림을 통해 ‘나야말로 누드화의 위대한 챔피언’이라 자부하지 않았을까.

[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http://news.mk.co.kr/v2/economy/view.php?year=2018&no=2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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